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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김규항씨의 블로그( http://www.gyuhang.net/ )에서 퍼온 글.
자녀는 없지만, 조직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시사점이 크다.


두어 가지 함정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잘 소통할 수 있는가?’ 부모들(이라고 적지만 엄마들. 한국의 아빠들은 교육의 실제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을 대상으로 한 교육 강연을 하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내 교육 강연이라는 게 ‘성적 올리기 비법’ 따위와는 동떨어진, 아이를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교육 현실을 넘어서는 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라 청중들도 교육 문제에 대해 시류를 거스르는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다. 질문은 대개 내 글에 적힌 아이와의 소통 이야기를 근거로 한다. 물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은 것이지만 나 역시 아이와의 소통에서 실수할 때가 있고 ‘망설이지 않고 사과하기’를 나름의 보완책으로 삼는 처지다. 어쨌거나 그간의 내 체험과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며 느낀 걸 적어본다. 이른바 ‘민주적인 부모가 아이와 소통에서 빠지기 쉬운 두어 가지 함정’.

첫째 함정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절차와 내용의 괴리다. 민주적인 부모들은 당연히 아이와 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 애쓰는 편이다. 문제는 이 민주적인 소통이 절차만 민주적인 경우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바람직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는 그 결론으로 대화를 몰고 가는 것이다. 소통의 권위와 논리적 능력에서 부모는 아이를 압도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니, 부러 제어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 즉 민주주의의 절차는 회복했으되 여전히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빼앗기고 억압받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닮은 데가 있다.

둘째 함정은 아이가 판단하고 선택할 만한 정보나 식견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의견을 무작정 존중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아이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부모가 제 교양이나 사회의식을 아이에게 대상화하는 자기애적 행동인데 생각보다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내 친구 녀석은 교육 현실에 관한 신문 칼럼에 엄청 감흥을 받은 어느 날 밤 제 초등학교 오학년 아들을 앉혀놓고는 ‘피시방 가는 시간 자율적으로 할 수 있지?’라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라면 또 모를까 남자아이가 ‘할 수 있다’고 하지 ‘하기 어렵다’ 하겠는가. ‘아이가 이상해졌어!’ 석 달 후 녀석의 집에선 소란이 벌어졌다. 석 달 동안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센 게임만 해댄 아이가 결국 사고와 인지 능력의 위기를 맞았던 것.

두 함정은 언뜻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 첫째를 피하려면 둘째로 빠질 것 같고 둘째를 피하자니 첫째로 흐를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거나 시도하되 정작 민주주의의 주인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은 하나다. 민주적인 부모 노릇은 권위적인 부모 노릇보다 훨씬 어렵다. 권위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어버이연합 수준의 패악 질을 일삼는 경우만 아니라면) 자연스레 부모와의 차이에 적응하게 되지만, 민주적인 부모를 둔 아이들은 워낙 가르치고 설파한 게 있어놔서 ‘남들 앞에선 훌륭한 체하면서 실제론’ 하며 크게 상처받기 십상이다. 상처는 진보적인 어른들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아이의 사회의식 형성에 장애를 일으킨다.

두 번의 민주정권이 기대와는 달리 인민들을 배제하는 정치로 일관하여 결국 인민들로 하여금 이명박 정권을 불러들이게 만든 상황은 민주적인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한 셈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사회적 소통이든 아이와의 소통이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존경이 살아 숨쉬려면 민주주의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늘 되새겨져야 한다. 다짐의 마음으로 모질게 말하자면, 주인이 빠진 민주주의는 좀더 교활한 방식의 독재일 뿐이다. 지금 여기, 민주주의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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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rinein
TAG 김규항
sovidence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 http://sovidence.tistory.com/ )
저도 데이타를 좀 들여다봐야겠는데,  소득, 연령과 학력을 함꼐 봐야 하는건 아닌가 싶네요.
'강남좌파' 논의도 언론에서 좀 부풀려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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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낙구 박사는 서울시 지역별 분석을 통해 가난한 동네는 야당을 지지하고, 따라서 계급정치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조기숙 교수는 야당의 주지지층은 중산층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요 블로그 내에서 관련 논의는 요기, 요기).

강남은 한나라당을 찍고 강북은 민주당이 유리하다는 건 팩트. 각종 여론조사에서 소득하층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소득중간층은 물론 소득상층보다 높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최근 획득한 지난 지자체 서울시 자료를 이용해 분석해 보니, 그 비밀은 연령효과와 소득효과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고연령층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높은데, 고연령층의 상당수가 소득하층이다. 고연령층 중에 소득하층이 얼마나 많은고 하니, 월급 200만원 이하를 소득 하층, 200-400만원은 중층, 400만원 이상을 상층으로 보면, 서울에서 60대 이상 인구 중 60%가 소득 하층이다. 반면 30대에서는 7%만이 소득 하층. 소득 하층 중에서 고연령층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년 72%가 60대 이상이다.

하지만, 고연령층 내에서 소득 상,중,하를 나누면 소득 상층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가장 높고, 소득 하층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가장 낮다.

각 연령층에서 소득에 따른 현 여권(=한나라당) 지지율은 아래 표와 같다. 보다시피 전체 응답자 중에서는 소득하층의 현 여권 지지율이 소득상층보다 높다. 하지만, (20대 제외) 각 연령층 내에서 소득상층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소득하층의 지지율보다 높다.

표1. 소득별, 연령별 현 여권(=한나라당) 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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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하층    소득상층 
---------------------------------
전체                 59.8          51.8

20대                 37.5          36.5      
30대                 21.7          30.2
40대                 38.8          46.1
50대                 58.7          63.6
60대 이상          64.4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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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소득하층의 절대 다수가 고연령층이고, 고연령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기 때문에, 마치 소득하층에서 한나라당을 더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 연령층 내에서 소득에 따른 정치 지지 성향을 보면, 평균적으로 소득 하층에서 한나라당을 덜 지지한다 (로짓분석을 돌리면 이 결과는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그렇다면 야당 지지층은 중산층이지 서민층이 아니라는 조기숙 교수가 틀렸고, 계급정치가 가능하다는 손낙구 박사가 옳은가? 100% 그렇지는 않다. 다시 한 번, 연령변수가 매개변수로 중요 역할을 한다. 50대 이상에서는 소득과 여권 지지율이 정비례하는데, 40대 이하에서는 소득하층보다 소득중층에서 현여권에 대한 지지가 낮다.

정리하면, 서민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주장은 틀렸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서민층이 아니라 고연령층이다. 계급정치가 가능하다는 손낙구의 주장은 지지된다. 각 연령층 내에서 서민층은 부유층 보다 한나라당을 덜 지지한다. 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 서민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라는 주장은 반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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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rinein
다음은 바이커 sovidence 님의 블로그( http://sovidence.tistory.com/ )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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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는 제도학파적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다. <23가지>의 일관된 요지는 경제발전은 마이크로 론이나, 개인의 기업가 정신이나, 자유시장경쟁이나, 교육의 증가가 아니라 자원, 인력, 기술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즉, 대기업과 같은 조직된 제도를 가지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직된 제도를 가지기 위한 정부의 개입은 개도국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자유시장주의를 택했던 80년대에 경제성장률이 세계적으로 낮아졌고, 후진국에서도 이 시기의 성장률이 낮아졌고, 반대로 스웨덴 등 자유시장주의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국가의 경제성장률이 나쁘지 않았다고 제시한다.

내가 <23가지>에 대한 여러 비판에 실망한 이유는 이런 장 교수의 핵심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곁다리를 붙잡고 있거나, 재벌을 비판하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장 교수의 주장은 정부의 개입을 통해 대기업을 키우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대기업이 주주자본주의로 가버리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정도가 매우 작아진다는 것이다 (다른 인터뷰에서 한국은 대기업은 얼마 전까지 주주자본주의를 한 적이 없었다고 얘기).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눈꼽만큼이라도 좌파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다 하는 비판이다. shareholder value가 아닌 stakeholder value에 기반한 기업의 가치지향점을 논의하는 상당히 일반적인 얘기다.



하여 남들이 아무 소리도 안하길래 나도 별로 아는 거 없지만, 어차피 블로그가 내 전공분야 논문도 아니니, 장 교수 핵심 논리에 대해 가볍게 비판해 보고자 한다.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킨 장 교수의 논리가 세탁기가 인터넷 보다 더 기술적으로 혁명적이고 더 많은 다수 대중의 삶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논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헌데, 이 논리를 장 교수의 경제성장론에 그대로 적용하면 장 교수의 논리가 모순된다. 1980년대 이전의 자유시장주의가 득세하기 이전의 경제발전은 장 교수의 "세탁기"로 대표되는 산업혁명적인 기술혁신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시기이고, 1980년 이후는 이런 기술혁신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되고, 기껏해야(?) 인터넷이 기술혁신을 주도한 시기다.

즉, 경제성장률의 감소는 장 교수가 주장하는 제도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술혁신률의 감소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R&D 투자는 1980년 이후 5배 이상 증가했지만, 새로운 기술의 등록률은 그와 비례해서 증가하지 않았다. 연구원 1인당 기술혁신률도 따진다면 오히려 1/5이하로 감소하였다. 혁신의 내용 또한 특허률의 증가로, 과거에는 혁신으로 치지도 않았던 것을 특허 등록하는 경우도 늘었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떼돈을 번 사람들 얘기를 많이 하는데, 과연 몇 명이나 그렇게 되었는가? 정보기술 발전의 초기 단계이다 보니, 빌게이츠, 쥬커버그, 마이클 델 등 아마츄어 주제에 학교 때려치우고 억만장자가 된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사람은 매우 소수다. 소위 말하는 TGIF (Twitter, Google, Apple-I series, Facebook)에 고용된 사람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하다. 반면 월마크의 종업원은 180만명이다. 현대자동차의 종업원도 5만명이 넘는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이를 개발한 소수는 억만장자가 되지만, 전체 경제에 끼치는 영향력은 GE나 포드 등의 산업혁명적 회사보다 훨씬 작다.

파발마(살아서 태평양 건너면 6개월)에서 전신(15분)으로의 진화 대비, 전신에서 전화(5분)로의 진화는 상대적으로 덜 혁신적이고, 전화에서 이메일(읽고 쓰는데 1분)로의 진화를 더 덜 혁신적이고, 이메일에서 문자메시지로의 진화는 더더 덜 혁신적이다.

90년대 이후 유럽보다 높은 미국의 성장률이 정보통신기술의 성장 기여도를 나타내는 것 아니냐고 할수도 있지만, 미국의 요소성장률마져도 사실은 중국 수입 부품의 가격을 잘못 계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자료를 이용한 검증이 필요하다.

경제성장은 기술, 자본, 노동력의 함수다. 장 교수는 경제는 항상 "지식중심"경제였기 때문에, 최근의 서비스업 중심 경제가 특별히 더 지식중심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과 발전, 그 지식의 산업발전으로의 응용이 항상 같은 비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산업혁명은 이전 시기와는 구분되는 이 비율의 폭발적 증가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이 비율은 등락이 있다. 특히 20세기 초부터 그 이전 15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기술혁신이 대량생산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모든 경제는 지식중심경제이므로, 모든 경제는 지식의 발전과 적용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높은 성장률과 그 이후의 낮은 성장률은 이 일반론에 의해서 우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 교수처럼 자유시장중심주의를 우선에 놓고 사고할게 아니라.

80년대 이후 성장률의 둔화는 기술발전의 둔화에 따른 것이고, 자유시장중심주의는 기술발전의 둔화에 따라 자본이윤율이 감소하자, 분배의 파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즉, 자유시장중심주의가 성장률 둔화의 원인이 아니라 자유시장중심주의가 성장률 둔화의 결과일 가능성이다.

김기원 교수도 성장률의 둔화가 자유시장중심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80년대가 아니라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성장률 둔화가 자유시장중심주의의 등장보다 앞서기에 연대기적으로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아니라 전자의 결과로 파생된 것이 자유시장중심주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장교수가 비판하는 자유시장주의는 국가 내 분배율의 악화에 대한 비판으로는 정당하지만, 이 비판이 성장률의 둔화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한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주장은 매우 거친 국가 간, 통시적 비교 이외에는 자유시장주의가 성장률 둔화로 연결되는 논리적 고리도 없고, 그에 대한 경험적 검증도 아직은 없다.


ps. <23가지>는 대중서이기에 설명을 생략했다고 할 수도 잇는데, 다른 곳에서 자세히 설명한 곳을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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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rinein
TAG 장하준